키요스에 진야(야마구치현): 조슈 번손 번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철저히 해설
키요스에 진야란?
기요스에 진야는, 나가토 쿠니토요우라군 기요스에무라(현재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기요스에 진야)에 있던 기요스에 번의 정청입니다. 청말번은 조슈번(藩藩)의 지번인 나가후번(長府藩)에서 더욱 분명한 이른바 ‘손번’으로 성립했습니다.
에도시대를 통해 모리씨가 다스려, 1만석의 작은 번이면서 독자적인 번정을 전개했습니다. 현재, 진야 터에는 시모노세키 시립 동부 중학교가 세워져 있어, 왕시의 모습을 추구할 수 있는 유구는 적습니다만, 지역의 역사를 말하는 중요한 사적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청말 진옥의 역사
성립의 경위
청말 진옥의 성립은, 나가후 번주 모리 히데모토의 유언에 끝을 발합니다. 승응 2년(1653년), 모리 히데모토는 죽음의 바닥으로, 2남의 모리 모토모토에 1만석을 분지하도록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유언을 받아, 나가후 번주가 되고 있던 모리츠나모토(히데모토의 장남)는,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해, 동생의 모토치에게 1만석을 분지했습니다.
만지 2년(1659년), 모리 모토치는 분지된 영지에 진야를 쌓아 청말 번이 정식으로 성립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슈번을 본번으로, 나가후번을 지번, 청말번을 손번으로 하는 3층 구조가 확립되었습니다.
역대 번주와 번정
기요스에 번은 초대 모리 모토모치에서 에도막부 말기 모리 모토 순까지, 약 200년에 걸쳐 모리씨가 다스렸습니다.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습니다.
- 초대 : 모리 모토치(모토노리)
- 2대 : 모리 모토히라(모토히라)
- 3대 : 모리 마사나기 (설마)
- 4대 : 모리타쿠 쿠니 (확실히)
- 5대 : 모리 마사아키(마사아키)
- 6대 : 모리 원세(모토츠구)
- 7대 : 모리 원승(모토츠구)
- 8대 : 모리 모토 준
1만석이라는 작은 번이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는 항상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본번인 조슈 번이나 지번인 나가후 번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번정을 유지했습니다. 막부 말기에는, 조슈 번 전체가 도막 운동의 중심이 되는 가운데, 청말 번도 그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폐번치현 후의 변천
메이지 유신을 거쳐 메이지 4년(1871년)의 폐번치현에 의해 청말번은 폐지되었습니다. 그 후, 메이지 6년(1873년)에는 진야의 토지와 건축물이 경매에 걸려, 민간에 지불하였습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군에 접수되고 있었습니다만, 전후의 쇼와 21년(1946년)에 학교 용지로서 시모노세키시에 납부되고, 다음 쇼와 22년(1947년)에는 유적지에 시모노세키 시립 동부 중학교가 개교했습니다. 이 학교는 현재도 운영되고 있으며, 진야 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청말 진옥의 구조와 규모
진야 배치
청말진옥은 1만석의 초번 정청에 어울리는 규모로 건설되었습니다. 성곽과는 달리, 천수나 이시가키를 가지지 않는 진야 형식이었습니다만, 해자나 토루에 의해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진야의 부지는, 현재의 시모노세키 시립 동부 중학교의 부지와 그 주변에 상당합니다. 중심에는 번주의 거관인 고텐이 있어, 그 주위에 관공서나 창고, 가신의 막소 등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부지의 외주에는 해자가 둘러싸여 진지로서의 체재를 갖추었습니다.
건축물의 특징
1만석이라는 돌고기에 맞는 규모의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고텐은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번주의 거주 공간과 정무를 맡는 공간이 구별되었습니다. 건축 양식은 에도 시대 중기의 무가 건축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진옥내에는, 연공미를 보관하는 창고나, 번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공서, 가신이 채우는 번소 등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또, 정원도 마련되어 있어, 번주의 거주 공간에는 일정한 문화적인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유구
해자의 유구
청말 진옥의 유구로서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해자의 일부입니다. 진야 주변을 둘러싼 해자는 현재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도시화의 진전에 의해, 왕시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호리는 미즈호리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진야의 방어 시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폭이나 깊이는 성곽만큼 대규모는 아니었습니다만, 진야로서는 표준적인 규모였다고 생각됩니다.
비석과 표지판
진야 터와 그 부근에는 청말 진옥의 존재를 나타내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석은 지역의 역사를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 설치되어 있으며, 진야의 위치와 역사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모노세키 시립 동부 중학교의 구내와 주변을 방문하여 이러한 비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학교 부지내에의 출입에는 제한이 있기 때문에, 견학시에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지형의 잔존
진야가 세워진 장소의 지형은, 지금도 어느 정도 그 특징을 남기고 있습니다. 청말의 땅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입니다만, 진야가 놓여진 장소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어,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진야가 쌓아 올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말 번과 조슈 번의 관계
손번으로 자리 매김
청말번은 조슈번(藩藩)의 지번인 나가후번(長府藩)에서 더욱 분명한 ‘손번’이라는 특수한 위치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3층 구조는 전국적으로도 드물고, 모리씨 일족의 결속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키요스에 번은 독자적인 번정을 실시하는 한편,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는 본번인 조슈 번이나 지번인 나가후 번과의 조정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에도막부 말기의 동란기에는 조슈번 전체로서 행동하는 것이 요구되었고, 청말번도 그 방침에 따랐습니다.
막부 말기 동향
막부 말기, 조슈 번은 도막 운동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청말번도 조슈번의 일부로 이 역사적인 전환기에 관여했다. 일만석이라는 작은 번이었지만, 조슈 번 전체의 움직임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시모노세키라는 지리적 위치는 막부 말기의 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청말번 영지도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시대의 격동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역사적 시설과 관련 사적
나가후 모리 저택
청말 진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나가후 모리 저택입니다. 쵸후 번모리가 제14대 당주의 모리 모토토시가 메이지 36년(1903년)에 세운 저택으로, 청말번 본가에 해당하는 나가후번의 역사를 전하는 중요한 시설입니다.
메이지 천황도 숙박되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저택은, 현재도 보존되고 있어 일반 공개되고 있습니다. 청말 진옥을 방문할 때는 함께 견학함으로써 모리씨 일족의 역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모노세키 시내의 막부 말기 사적
시모노세키 시내에는, 기요스에 진야 이외에도 많은 에도막부 말기 관련의 사적이 점재하고 있습니다. 타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기병대의 진야 자취나, 본진 이토 저택 자취 등, 막부 말기의 격동기를 전하는 사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적을 둘러보면 청말번이 존재했던 시대 배경과 조슈번 전체가 완수한 역사적 역할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카마 신궁 주변
시모노세키의 역사를 말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카마 신궁입니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입수한 안덕천황을 모시는 신사로 시모노세키의 역사의 깊이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청말진옥의 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 지역은, 중층적인 역사가 쌓인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액세스 및 견학 정보
위치
주소: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키요스에 진야
기요스에 진야 터는 현재 시모노세키 시립 동부 중학교의 부지와 그 주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학교 부지 내에의 출입에는 제한이 있으므로, 견학시에는 주변으로부터의 관찰이나, 공개되고 있는 비석 등을 중심으로 견학하게 됩니다.
교통 액세스
대중교통:
- JR 산요 본선 ‘코즈키역’에서 차로 약 10분
- JR 산요 본선 ‘기요스에역’에서 도보 권내
- 시모노세키 역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도보
자동차:
- 중국 자동차도로 ‘시모노세키 IC’에서 약 15분
- 주차장은 학교 시설이므로 일반 이용 불가. 주변 공공 주차장 이용
견학의 주의점
진야 터의 대부분은 학교 부지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출입은 할 수 없습니다. 견학은 다음 사항에 유의하십시오.
- 학교 부지 내로의 무단 출입은 피한다
- 주변 도로나 공개되고 있는 비석 등에서 견학한다
- 학교의 수업이나 행사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한다
- 사진 촬영은 공도에서만 실시한다
청말 진옥의 역사적 의미
손번 제도의 예
키요스에번은 다이묘가가 지번을 가지고, 또한 그 지번이 분지를 실시하는 「손번」의 실례로서 에도시대의 번제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례입니다. 1만석이라고 하는 소규모이면서, 독자적인 번정을 계속 유지한 것은, 모리씨 일족의 결속과, 에도 막부의 통치 시스템의 유연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역 역사의 위치
시모노세키라는 지역의 역사에 있어서, 기요스에 진야는 에도시대의 지역 지배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완수했습니다. 현재의 청말지구의 지명이나 마을 나누기에는, 진야 시대의 명잔이 보여져, 지역의 아이덴티티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마쿠스에 역사와의 관련
조슈번이 에도막부 말기의 정치적 변혁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가운데, 청말번도 그 일부로서 역사의 전환점을 만났습니다. 소번이었지만, 조슈 번 전체의 움직임 속에서, 청말 번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말 진옥 연구의 현상과 과제
사료 상황
청말 진옥에 관한 사료는, 폐번치현 후의 혼란이나 전재등에 의해, 반드시 충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번정의 상세나 진야의 건축 구조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록으로부터 추측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야마구치현내의 문서관이나 박물관, 시모노세키시의 향토 자료관 등에는, 기요스에 번에 관한 사료가 부분적으로 보관되고 있어 연구자에 의한 조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구 보존 문제
진야 터지는 학교 용지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일면에서는 유적의 파괴를 막을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다른 면에서는 본격적인 발굴 조사나 유구의 보존·공개를 곤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향후, 학교 시설의 개수등의 기회에, 유구의 조사나 보존이 진행될 것이 기대됩니다.
지역의 역사 교육
청말 진옥의 역사는 지역 역사 교육에 중요한 소재입니다. 현재, 철거지에 세워진 동부중학교에서는, 지역의 역사로서 청말 진옥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어, 학생들이 자신들의 학사가 역사적인 장소인 것을 인식하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키요스에 진야와 시모노세키의 역사 관광
역사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능성
시모노세키시는 에도막부 말기사의 무대로 많은 관광객을 모으고 있습니다. 다카스기 신사쿠 연고의 땅이나 시모노세키 전쟁(마칸 전쟁)의 무대 등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적이 다수 존재합니다.
청말진옥은 이러한 유명한 사적과 비교하면 지명도는 높지 않지만, 에도시대의 지역 지배의 실태를 나타내는 사적으로서 역사 애호가나 연구자에게는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향후, 적절한 안내판의 설치나 정보 발신에 의해, 역사 관광 자원으로서의 활용이 기대됩니다.
다른 역사적인 장소와의 협력
시모노세키 시내의 다른 역사적 시설과 연계함으로써, 청말 진옥의 가치를 보다 높일 수 있습니다. 특히, 쵸후 모리 저택이나 쵸후 성시, 공산사 등의 쵸후 지구의 사적과 조합함으로써 모리씨의 지배와 지역사회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광 루트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 활용
현존하는 유구가 한정되어 있는 청말 진옥에 대해서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복원이나 정보 제공이 유효합니다. CG에 의한 진야의 복원 영상이나, AR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한 현지에서의 정보 제공 등,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는 것으로, 왕시의 모습을 방문자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요약
기요스에 진야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던 기요스에 번의 정청으로서, 만치 2년(1659년)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약 200년간, 지역의 정치·행정의 중심이었습니다. 조슈번의 손번이라는 특수한 자리매김하면서 모리모토 모토이래 8대에 걸쳐 독자적인 번정을 유지했습니다.
현재, 진야 터의 대부분은 시모노세키 시립 동부 중학교의 부지가 되어 있어,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해자의 일부나 비석 등으로부터 왕시를 망할 수 있습니다. 1만석의 소번이면서도, 에도시대의 번제도나 지역 지배의 본연의 자세를 나타내는 중요한 사적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모노세키시를 방문할 때에는, 보다 저명한 에도막부 말기 사적과 함께, 청말진야자취에도 발길을 옮겨, 에도시대의 지역사회와 모리씨 일족의 역사에 생각을 느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지역에 뿌리를 둔 역사의 쌓기가 현재 시모노세키라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